1. 고구려 시조 주몽(동명성왕) 이야기

부여 금와왕 이야기

동부여의 왕 해부루는 나이가 많았으나 자식이 없었다. 곳곳의 유명한 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해부루가 탄 말이 멈추고 곤연 연못가에 멈추고  큰 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해부루가 신하를 시켜서 돌을 들추어 보았더니, 돌 밑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를 닮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하늘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한 해부루는 아이에게 '금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해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가 왕이 되었다.

금와왕과 유화부인의 만남

하루는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에 사냥을 나갔다.  그때,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는데, 금와왕이 왜 이곳에 있냐고 물었다. 이에 유화부인이 자신은 '하백'의 딸로서 자신이 동생들과 놀다가 한 남자가 자신을 옥황상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여 결혼을 한 이후에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하백이 자신을 이곳으로 귀양 보냈다고 하였다.  금와왕은 아름다운 유화 부인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주몽의 탄생

금와왕과 왕궁으로 돌아온 유화부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해 그림자가 나타나서 유화 부인을 비추기 시작하더니 안과 밖으로 어딜 가나 유화 부인을 따라다녔다. 이 사건 이후 유화부인이 아이를 가졌고, 얼마 후 거다란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고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 주었지만, 동물들의 그 알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길가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날아와서 알을 품었다. 금와왕이 도끼로 알을 깨려고 하였으나 깨어지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금와왕은 알을 다시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유화 부인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고 보살피자 얼마 후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고, 글공부 실력도 뛰어났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보다도 유화 부인의 아들이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이름이 주몽이 되었다.(부여에서는 당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다) 자신을 위협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금와왕은 첫째 아들, 대소에게 주몽을 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몽을 아끼던 대소 왕자는 주몽을 죽이지 않고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게 하였다.

고구려의 건국

유화 부인은 주몽이 처한 상황을 알고 주몽을 멀리 떠나게 하였다. 주몽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부여의 남쪽 땅을 향하여 떠났다. 주몽이 떠난 사실을 알고, 대소는 군사들에게 주몽의 뒤를 쫓게 한다. 쫓기던 주몽과 일행들은 엄사수(압록강의 동북쪽)에 이 도착하였으나 배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위기에 처한 주몽이 자신은 하백의 손자 이건만 다리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뒤에서는 적들이 쫓아오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탄식하고 있었다. 그때, 물속에서 자라들이 떠오르며 다리를 만들어 주어서 주몽과 그 일행들은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대소왕자의 무리든을 무사히 따돌린 주몽 일행은 압록강의 중류 지역인 졸본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다. 이 나라가 고구려이며 주몽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다. 이때 주몽의 나이는 22살이었으며 기윈전 37년의 일이다.

2. 신라 이야기

박혁거세(신라의 제1대 임금) 이야기

신라 경주 지방에는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무산대수촌, 취산진지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 등 여섯 개의 부족이 있었다. 이들 부족의 부족장들은 외부의 침략을 물리치고 안으로 힘을 합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어느 날,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족장들은 소식을 듣고 우물가로 찾아갔지만, 말은 사라지고 그곳에는 푸른빛을 띤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알을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보살폈더니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부족장들은 아이에게 '혁거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박모양의 알에서 나와서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박혁거세는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빨랐고, 매우 총명한 아이로 자라났다. 이러한 박 혁거세를 부족장들은 13살이 되자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박혁거세는 여러 부족을 대표로 하는 지도자가 되었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고 하고 도읍은 '금성(오늘날의 경주)'로 정하고 자신을 '거서간(신라의 제1대 임금)'이 되었다.

알영 부인 이야기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한 부족장들은 박혁거세의 베필을 찾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얼마 후, '알영정'이라는 우물에서 용이 나타나서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에서 알을 낳고 사라졌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고, 후에 박혁거세의 부인이 되었다.

석탈해(신라의 제4대 임금) 이야기

용성국의 왕과 여인국의 왕녀가 혼인하여, 7년째가 되었을 때 왕녀가 임신하여 '석탈해'가 태어났다. 석탈해는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의 형상이 아닌 '알'의 형태로 태어났다. 이를 불길하게 생각한 용성국의 왕은 신하들에게 알을 바다로 던져 버리게 하였다. 알은 나무상자에 담겨서 바다를 떠다니다가 파도에 밀려서 동해안 아진포(지금의 영일)에서 한 노인에게 발견되었다. 노인이 나무상자의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노인이 아이를 발견할 때, 나무상자 주위로 까치가 주위를 맴돌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한자 '까치 작'자에서 '새 조'자를 뺀 '석'을 성으로 하고, 이름은 '탈해'라고 하였다. 석탈해는 신라의 제2 대 임금인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훗날 제3 대 유리왕의 뒤를 이어서 신라의 제4 대 임금이 되었다.

김알지(신라의 제7 대 임금) 이야기

석탈해가 신라의 왕이 되어 신라를 다스린 지 9년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밤, 금성(지금의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석탈해 왕은 이 일을 이상히 생각하고 신하들을 금성으로 보내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게 하였다. 얼마 후, 왕궁으로 돌아온 신하들은 금으로 된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신하들은 시림의 한 나무에 금으로 된 상자가 있었고, 그 옆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전하였다. 석탈해 왕은 직접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석탈해는 아이가 금으로 된 상자인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서 성을 '김'이라 하고 이름을 '알지'라고 붙여주었다. '시림'지역의 땅이름은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으로 변경하였다. 석탈해는 자신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 것을 김알지에게 권하였으나 처음에는 거절하였다. 세월이 지나서 김알지는 신라 제7대 임금(미추왕)이 되었고, 경주 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신라의 왕 이름과 국호의 변화]

*신라의  '왕'에 대한 호칭을 알아보자 : 초기의 신라의  왕에 대한 호칭(대상을 부르는 말)은  정해지지 않아서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등이 사용되었다. 제1대 임금 박혁거세는 거서간, 제2 대 임금 남해왕은 차차웅, 제3 대 유리왕부터 제18 대 실성왕까지는 이사금, 제19대 눌지왕부터 제22 대 지증왕까지는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신라의 국호의 변화를 알아보자 : 나라 이름을 칭하는 국호도 '사로ㆍ사라ㆍ서벌ㆍ서나벌ㆍ서야 벌ㆍ서라벌'등이 사용되다가 제22 대 지증왕 이후부터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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